나는 이렇게 보았다 – 뉴욕편

2024년 08월 19일
이웃 손지원 님

안녕하세요, 옆미 이웃으로 활동 중인 지원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미술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수백수천 개의 꽃들이 있지만, 어느 꽃이 더 아름다운지 절대적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점이 다양하기 때문이죠. 어떤 이는 장미라 답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이름 모를 들꽃이라 말할 것입니다. 이들 중 그 어느 답변도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보았다> 시리즈는 제가 마주한 미술들 중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씩 선보일 예정입니다. 미술을 감상하는데 있어 어떠한 답도, 방식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본 시리즈를 읽으며, 이곳에서 여러분의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 또 찾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고든 마타 클락(Gordon Matta-Clark) <Bingo>

– 집이 없어졌는데, 다시 부활했습니다!

Gordon Matta-Clark, Bingo, 1974, building fragments : painted wood, metal, plaster, and glass, three sections,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본인직접촬영

세트장의 한 부분을 미술관에 옮겨 놓은 것 같은 <Bingo>는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이하 모마)의 4층 한 전시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 지으며 전시되고 있었다. 이 작품이 얼마나 길고 컸는지 미술관 가벽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이 작품 뒤에는 관람객들이 창밖을 보며 쉴 수 있는 의자가 마련돼있었다.

의자에 앉아 작품을 바라보니, 의자에서 본 <Bingo>와 의자 맞은편에 서서 보는 <Bingo>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자에 앉기 전까지는 세트장이 전시돼 있는 줄 알았는데, 의자에 앉아 다른 면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주택 건물 파편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Bingo>는 주택 건물 파편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덩어리가 나란히 이어져 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짧고 간단한 이 질문 속에는 다양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 파편이 미술관의 한 전시장을 전부 차지하며 전시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인가?‘ ‘이 작품은 어떠한 맥락에서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 등 작품으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궁금증인 것이다. 그렇다면 <Bingo>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고든 마타-클락의 작품 세계가 어떤지 알아보자.

  • 고든 마타-클락의 작품 세계 : ‘건물-자르기’ 퍼포먼스
Gordon Matta-Clark, Bingo 5 (Documentation of the action "Bingo" made in 1974 in New York, United States), 1974, printed 1977, Gelatin silver print, Sheet : 20.6cm x 25.2cm / Image : 20.6cm x 25.2cm,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gift of Harold Berg

고든 마타-클락(1943-1978)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 교외의 버려지는 주택들을 바탕으로 예술적 실험을 시도했던 예술가이다. 그는 폐건물이 된 주택들을 직접 자르고 조각내는 퍼포먼스, ‘건물-자르기’ 를 통해 전통적인 집의 속성을 파괴하고, 집을 완전히 낯선 공간으로 전환하였다.

본래 집은 공적인 곳에서 벗어나, 사생활을 보장하는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아늑하고 친밀한 공간의 집을 절단함으로써, 집은 집으로써의 공간이 아닌 혼란스럽고 낯선 ‘어떤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집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집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 기능으로서 역할하지 않는다. 문, 계단, 벽, 창문은 실용성을 잃어버린 채 ‘파편’으로 전락한다. 마치 고대 신전에 박공되어 있던 프리즈가 신전과 분리되어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전시될 때,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고든은 조각난 집을 어떻게 작품인 <Bingo>로 재탄생 시켰을까? 장소 특정적인 작업의 특성과 완성품을 작품으로 남기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로 인해, 그가 당시 작업했던 작품 원본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대신 관람객이 자신이 자른 주택 건물 내부를 들어와 직접 보게 한다거나, 자신의 작업 과정을 다큐멘터리나 사진, 또는 콜레주(collège)형식으로 사진을 재구성하여 회화 작품으로 남겼고,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 여기서 잠깐!
장소 특정적인 작업이란,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뜻해요. 장소 = 작품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해당 장소가 사라지면, 작품과 그 의미도 함께 사라지게 된답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이 있어요.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를 초월한 <Bingo>

이처럼 고든의 작업 과정과 결과는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매체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넘어, 고든이 대비되는 두 관점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든이 ‘건물-자르기’를 통해 분해했던 건물들은 때로는 관람객에게 직접 내부를 걷게 함으로써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록 <Bingo>는 수행 후 바로 철거가 되어 공간을 체험할 기회가 없었지만, 고든의 다른 작품인 <Splitting>의 경우 자른 건물 내부에 관람객이 들어와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감각적인 체험을 통해 관람객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든이 보여주었던 포스트모더니즘적 양상이다.
그러나 건물 파편들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순간, 그것들은 ‘조각’으로 변모한다. 이미 사라져 버린 건물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공감각적인 체험을 할 수 없다. 눈앞에 ‘전시된’ 파편들은 미술관에 놓여있는 여느 조각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남겨진 파편들은 미술관에 놓임으로써 관람객에게 일방적으로 감상되어지는 조각이 되는, 철저히 모더니즘적 양상을 띤다. <Bingo>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통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다.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보는 방식의 차이 모더니즘은 작가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비재현적이고, 심미적인 단 하나의 작품(원작성,originality)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즉, 작품 그 자체가 예술이고 중요하다는 것이죠. 작가가 창작한 작품은 회화라면 미술관 벽에 걸리게 되고, 조각이라면 단상 위에 놓여진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은 걸려있고, 놓여진 작품을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더니즘 미술을 형체를 잃어버리며 난해해지기 시작했고, 엘리트주의적으로 변질되었어요. 이에 반발하며 새로운 미술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이랍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관람객이 중심이 되어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람객이 작품과 소통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중요시했답니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에서 벗어나, 관람객과 작품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창작했답니다. 이 때부터 관람객은 수동적인 감상법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감상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나는 이렇게 <Bingo>를 보았다.

그렇다면 고든 마타-클락은 어떻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이 상반되는 두 특징을 함께 포함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Bingo>를 통해 이를 알아보자. <Bingo>는 고든이 행했던 건물-자르기의 흔적을 보여주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모두 가진 독특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Bingo>는 철거를 앞둔 교외 주택을 격자로 나눈 뒤, 중앙의 직사각형만이 남을 때까지 나머지 직사각형을 모두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세 개의 건물 파편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고든은 자신이 집을 자르는 현장을 ‘Super 8 film’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이때, 집을 포크레인이 무너뜨리듯이 무작위로 부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하에 정밀하게 집을 ‘조각’하였다. 고든이 직접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 집을 자르고 조각하는 행위 그 자체는 퍼포먼스 아트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든의 <Bingo>는 퍼포먼스 아트로써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Bingo>는 퍼포먼스 아트가 아니다. 다시 말해,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퍼포먼스 아트는 행위가 수행되는 그 시간에만 의미를 가지는데, 나는 지금 2024년 뉴욕 모마 4층 의자에 앉아<Bingo>를 보고 있고, <Bingo> 작품에 대한 고든의 행위는 이미 1974년 어느 날에 끝나버렸다. 완성된 <Bingo>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이 작품은 그저 ‘입체 조각’에 불과하다.
적어도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1974년 고든이 건물을 자르는 순간을 지켜보는 않는 이상, <Bingo>는 그저 세 개의 건물 파편이 세워져 있는 입체 조각으로 비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Bingo>는 모더니즘적 입체 조각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충분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현 시간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 2024년 4층 의자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나는 다른 의미로 [나-<Bingo>-<Bingo>가 전시된 공간]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 순간 <Bingo>는 나를 지켜주는 집과 같은 ‘방어막’이다. 4층 공간에는 수많은 인파가 있으며, 작품이 놓인 복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고, 이 중에는 작품을 보기 위해 작품 앞에 서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Bingo> 덕분에 나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집에 있는 창문 사이로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Bingo>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고든이 자르면서 사라졌던 속성인, ‘집’과 ‘보호’가 되살아난다. 작품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방패막이 되어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2024년 2월 모마 4층 공간에서 나와 <Bingo>의 상호작용을 통해, 모마 4층의 공간은 북적이던 공간에서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2024년 <Bingo>가 가진 포스트모더니즘 성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4년 2월 눈오는 날 《Bingo》 작품 뒤 조용한 공간에 앉은 의자에서 찍은 모마 풍경. 본인직접촬영.

[이미지]

손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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