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아일랜드》

2024년 11월
이웃 손지원님

안녕하세요, 돌아온 옆미 이웃 손지원입니다:) 8월호에서 소개해드렸던 Ibram Lassaw(이브람 라사우)의 <착각과 실체>는 우리로 하여금 형상이 존재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했나요?

서서히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자유분방한 붓질을 가진 작품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과 같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따뜻한 차 한 잔과 즐겨주세요!

Jackson Pollock의 <One: Number 31, 1950>

이젤에서 내려온 회화 : 완전히 사라진 현실

Jackson Pollock, One: Number 31, 1950, 1950, oil and enamel paint on canvas, Sidney and Harriet Janis Collection Fund(by exchange), 1968, 본인직접촬영

한 번쯤 미술관 어디에서인가 들어봤을 그 이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아마 모네, 피카소 만큼이나 익숙한 작가이자 동시에 전세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통 미술관에서 잭슨 폴록을 설명할 때에, 추상표현주의 선구자, 뜨거운 추상, 그리고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왜 잭슨 폴록이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 라고 불리게 됐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현대미술의 평면성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움직임, 즉 몸짓(행동)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것을 뜻해요. 바닥에 수평으로 캔버스를 눕힌 다음, 그 위에 서서 온 몸을 사용해 즉흥적으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흩뿌린답니다. 또 다른 말로는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 이라고도 해요.

  • 마네, 회화의 평면성의 출발을 시사하다.

현대미술은 마네로부터 시작됩니다. 마네는 근 500년동안 이어져 오던 서양미술의 전통에 보란듯이 반항하며, 그 틀을 깨버립니다. 500년 동안 계승돼오던 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마네는 회화의 여러 부분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보였는데, 그 중 하나가 ‘평면성’ 입니다. 마네 이전의 회화는 캔버스 위에 시각적 환영(illusion)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과 똑같은 가상의 3차원 공간을 구현하였습니다. 즉, 캔버스 속 공간이 마치 현실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네는 캔버스는 3차원 공간을 형성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캔버스 자체가 입체가 아닌 평면이기 때문에, 평면으로 마주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캔버스의 평면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단순하지만 독특한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캔버스에 그려진 주제와 바탕을 완전히 색으로 덮어버리는 것이었죠. 즉, 캔버스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모두 평면적으로 그려지고, 색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캔버스에서 더 이상 환영적인 체험을 할 수 없게 됐죠.

Edouard Manet, Olympia, 1863, 캔버스에 유채, H. 130,5 ; L. 191 cm; pds. 120 kg. 프레임 H. 177,5 ; L. 239 cm, Offert à l'Etat par souscription publique sur l'initiative de Claude Monet, 1890,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우리는 <올랭피아>를 통해 이를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매춘부의 신체는 과거 르네상스에서 표현되던 방식과는 첨예하게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유채 물감을 사용하여 ‘입체적인’ 신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신체라는 형태 속에 유채 물감을 ‘채우는’ 듯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색으로 일률적으로 칠해진 피부는 신체를 더욱 평면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올랭피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평면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배경입니다. 밝은 매춘부에 비해 극단적으로 어둡게 칠해진 뒷배경은 마치 배경이라는 것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어두운 배경 사이로 짙은 녹색 커튼과 어두운 금빛 벽이 보이지만, 한 눈에 포착하기에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배경의 색상 이외에도 원근감의 측면에서도 평면성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어두운 색이 쭉 밀고 나간 배경 속에서 어떠한 원근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배경 속 공간이 뒤로 더 확장돼 보인다든가, 명암을 통한 무한한 공간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오히려 평면적으로 그려진 커튼과 간이벽은 우리에게 캔버스가 평면임을 다시 한 번 더 인식시켜 주려는 듯합니다.

우리는 작품 속 매춘부와 배경을 통해서 <올랭피아>에서 얼마나 평면성이 강조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평면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완전한 평면성의 도달

잭슨 폴록은 <One: Number 31, 1950>를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완성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액션 페인팅을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수적인데, 바로 캔버스의 위치입니다.

잭슨 폴록 이전까지 캔버스는 이젤이라는 삼각대 위에 ‘수직으로’ ‘놓여져’ 그려 졌습니다. 심지어 마네 때까지도 말이죠. 그렇다면 이젤 위에 캔버스가 수직으로 놓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림을 그리고자 할 때 작가는 접힌 이젤을 편 뒤, 그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습니다. 그 뒤 작가는 의자에 앉고, 작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이젤의 높이를 조절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죠. 외부 세계를 한 번 보고 캔버스로 옮기고, 또 다시 보고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을 반복해나가며 작품을 서서히 완성해나갑니다.

이처럼 작가의 눈높이와 캔버스가 동일한 수평 선상에 있다는 것은 재현적으로 외부세계를 캔버스에 옮기겠다는, 담아내겠다는 욕망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담겠다는 의지는 작가로 하여금 현실세계와 캔버스의 세계를 넘나들며, 작은 풀 한 포기조차 놓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재현을 추구하던 시절의 캔버스는 반드시 이젤에 수직으로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재현과 환상을 포기했던 마네 시대 때까지도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잭슨 폴록이 등장하면서 이젤과 캔버스는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즉, 캔버스가 이젤에서 내려와 ‘바닥’에 위치하게 된 것이죠. 캔버스는 철저히 수평으로만 이루어진 바닥에 ‘수평’으로 ‘눕혀’졌습니다. 그리고 잭슨 폴록은 붓과 물감통을 들고, 커다란 캔버스 위에 서서 물감으로 뒤덮힌 붓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치며 물감을 흩뿌리거나 또는 묵직한 시럽이 뿌려지듯이 물감 덩어리를 떨어뜨리기도 했죠.

  • 물감은 어디로 튈지 몰라요?!

이 때 잭슨 폴록이 뿌린 물감은 완벽한 스케치 후 색을 입히는 계산적인 과정 이라기 보다는 즉흥에 더 가까웠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계산이라고 할 수 있는, 어느 물감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뿌리거나 떨어뜨릴지 정도에 대해서는 작가의 개입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뿌려지는 물감이 캔버스의 어느 곳에, 어떤 형태로 안착 될지는 철저히 ‘물감 마음대로’이죠. 좀 더 정밀하게 말해보자면, 물감이 뿌려지는 순간, 신체의 힘과 신체에 의해 생성된 바람이 더해져 그들이 인도하는 길을 가야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물감을 뿌리려는 짧은 순간, 붓 끝을 타고 떨어지는 동그란 물방울 자국 같은 물감 덩어리 역시 즉흥적 이라고 볼 수 있죠.

즉흥적인 물감은 마치 실타래가 서로 얽히고 뭉치는 것처럼 어지럽고, 복잡하게 화면을 채우며 구성합니다. 이 선들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죠. 이 때문에 작품을 감상할 때 따로 정해진 위치나,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흩뿌려진 검은 선과 흰 선은 서로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시선을 집중시키죠.


  • 서양회화 전통의 청산

이처럼 잭슨 폴록은 눕혀진 캔버스와 수직으로 하강하는 페인팅 기법을 통해 추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전까지 여러 작가들이 추상을 시도하였지만, 캔버스 자체를 눕혀 작업을 할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마네가 전통적인 서양회화에서 반란을 자처하며 서양회화의 전반적인 전통을 탈피하고자 했다면, 잭슨 폴록은 마네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잔재까지도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전통을 완전히 청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손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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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보는 방식의 차이 모더니즘은 작가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비재현적이고, 심미적인 단 하나의 작품(원작성,originality)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즉, 작품 그 자체가 예술이고 중요하다는 것이죠. 작가가 창작한 작품은 회화라면 미술관 벽에 걸리게 되고, 조각이라면 단상 위에 놓여진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은 걸려있고, 놓여진 작품을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더니즘 미술을 형체를 잃어버리며 난해해지기 시작했고, 엘리트주의적으로 변질되었어요. 이에 반발하며 새로운 미술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이랍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관람객이 중심이 되어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람객이 작품과 소통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중요시했답니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에서 벗어나, 관람객과 작품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창작했답니다. 이 때부터 관람객은 수동적인 감상법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감상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