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서 기호까지

2024년 
이웃 승규님

2024 화랑미술제에 다녀왔다. 전시는 삼성동 코엑스에서 4월 3일(수)부터 7일(일)까지 진행되었다. 3일은 VIP 관람이라 일반 관람 첫날인 4일, 목요일을 선택했다. 주말엔 사람이 많고, 평일이라는 점에서 목요일과 금요일은 동일하지만,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목요일이 마음에 맺힌 것이다. 당일 날씨는 유독 좋았고, 오전은 무엇도 부럽지 않다는 듯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생각은 퍽 다정한 말처럼 머릿속에서 천천히 울렸다. 갤러리현대 부스로 가면 유근택 작가님의 작품이 있을 것이고, 그 앞에서 나는 오전에 밀리지 않는 표정을 짓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입장 시간은 11시였다. 10분 전에 도착해 발권하고 입장하는 줄에 서 있는 동안 학창 시절 시험 날이 떠올랐다. 시험 10분 전, 책상 위엔 필기도구와 뒤집어진 시험지가 있고, 손은 머리 위로 올린 상태다. 얼마 안 있으면 시험이 시작되겠다. 초조함과 조급함 그리고 약간의 설렘. 정각이 되자 시험지가 서서히 뒤로 넘어오는 듯 한 속도로 줄이 줄어들었다.

유근택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작년 7월이었다. 파주에 위치한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진행되었던 전시였는데, 처음 본 순간 좋아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익숙하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라 작품 앞에서 몹시 낯설어했다. 단지 처음 봐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 아아! 동양화 이미 • 항상 • 변화 >, 아트센터 화이트블럭(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2023.07 – 10.09
유근택, 생.장, 한지에 수묵채색, 205×223cm, 2022
유근택, 대화, 한지에 수묵채색, 208×221cm, 2022

두 번째 만남은 갤러리현대에서 진행된 개인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시 첫날에 볼 수 있었는데, 그날도 오전이었다. 물론 그때 오전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하에서 2층까지, 그 반대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갤러리를 활보했다. 연신 정말 말이 안 된다며 감탄을 쌓았는데, 그것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될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 < Reflection >, 갤러리현대(서울 종로구 삼청로 14), 2023.10.25 – 12.03
유근택, Moving Life, Black ink, white powder, tempera and gouache on Korean paper mounted on wood, 205×220cm, 2018
유근택, Moving Life, Black ink, white powder, tempera and gouache on Korean paper mounted on wood, 205×187cm, 2018

마지막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이루어졌다. 해당 전시는 앞선 두 전시보다 가장 먼저 시작되었지만, 전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1월 말에 보게 되었다. 비교적 따뜻한 날씨가 옷차림의 무게를 덜었고, 전시는 기나긴 산책이었다. 평소보다 긴 산책 코스를 따라 걷다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 얼마간 머무르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피로보다는 필요가 더 컸기 때문일까? 그날 밤 졸음은 이른 기색 없이 평상시처럼 찾아왔다.

  • < 동녘에서 거닐다 : 동산 방주환 컬렉션 특별전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 2023.05.18 – 2024.02.12
유근택, 산책, 종이에 먹, 색, 108×98cm, 2007
유근택, 어쩔 수 없는 난제들, 종이에 먹, 색, 135×167cm, 2002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니 각각의 전시들은 저마다 계절을 맡고 있었다. 마치 그것에 책임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작은 여름이었다. 합정역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파주로 가는 길은 무더운 여름날을 응시하게 했는데, 그 과정은 소풍과 여행 사이 어디쯤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에 손끝이 닿을 리 없지만, 가을은 유독 그 거리가 멀게만 느껴져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횟수의 증가는 높은 하늘의 반영일지도. 걷기 좋은 날은 전시 보기 좋은 날. 당일 나의 발자국은 삼청동 길보다 갤러리에 더 많이 찍혔을 것이다. 그 좋은 날씨 두고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찾을 당시는 1월 30일, 겨울의 중점이었다. 그 주가 평소보다 포근했는지, 그날만 그랬는지 몰라도 추위에 움츠러들지 않은 어깨가 산책을 함께했다. 이번 화랑미술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주변에 활짝 핀 꽃은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계절에 대한 생각을 제자리에 놓고, 전시장에 입장했다. 모든 걸 다 제쳐두고 갤러리현대 부스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풍경도 스쳐 가며 자연스럽게 가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은 내게 전시였다.

2024 화랑미술제에 156개의 갤러리가 참여했고, 900여명의 작가들이 약 10,000여점의 작품을 출품했다고 한다.

화랑미술제는 코엑스 C홀과 D홀에서 개최되었고, C홀을 둘러본 후 내부 카페에서 얼마간 쉬었다(갤러리현대 부스는 D홀에 있었다). 단기간에 여러 작품을 보니 꽤 지쳤던 것이다. 마치 많은 사람을 만난 후 진이 빠지는 것처럼. 그때 마셨던 커피는 첫맛은 기대 이하였지만, 마실수록 괜찮아져 나중엔 상당히 좋아졌다. ‘볼수록 좋아지는 작품이 있는데, 이 커피도 그런 걸까?’, 끌어당김과 몰입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예의 부스에 도착한 건 입장 후 1시간쯤 흐른 뒤였다. 부스 안에는 당연히 유근택 작가님의 작품이 있었고, 이 마땅함은 내게 웃음을 주었다. 잔 안에 얼음이 녹듯 조용한 웃음이었다. 좋아하는 대상이 마땅함과 함께할 때 표정은 입가에 미소를 지피는지도 모른다. 반가움은 그동안 서렸을 수도 있는 낯섦을 거두었고, 익숙함 속에서 작품을 참 오래 보았다.

“봄입니다.”
“바깥엔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꽃이 피지요.”

인용 출처_화랑미술제.

유근택, Fountain, Black ink, white powder, tempera and gouache on Korean paper mounted on wood, 146×102cm, 2023
유근택, Fountain, Black ink, white powder, tempera and gouache on Korean paper mounted on wood, 67×44cm, 2022

코엑스 D홀을 다 둘러본 후 집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갤러리현대 부스로 갔다. 이미 유근택 작가님의 작품을 충분히 보았지만, 양손에 사탕을 가득 쥐고 있어도 다른 사탕에 눈을 때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곳에 얼마간 머물렀다.

좋아하는 작품을 두고 돌아가는 길은 항상 주저하게 된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데, 이 주저하는 마음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면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리 아쉽지만은 않을 터다. 그때의 만족감은 흡사 몹시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는 느낌과 같았다. 갈증의 해소로 한껏 나아진 기분이 목 안 깊숙이 청량감을 주었다.

취향과 기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취향(趣向)은 사전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을 의미하고, 기호(嗜好)는 ‘즐기고 좋아함’을 의미한다. 좀 더 단어를 분석해 보면, 취향은 뜻 ‘취(趣)’에 향할 ‘향(向)’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호는 즐길 ‘기(嗜)’에 좋을 ‘호(好)’로 구성되어 있다. 취향은 뜻,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고, 기호는 말 그대로 그 대상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오늘 유근택 작가님의 작품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화랑미술제에 갔고, 그곳에서 작품을 보며 양껏 즐기고 여전히 좋아했다.

2024 화랑미술제는 취향에서 시작해 기호로 끝맺었다.

  • 취향과 기호의 사전적 의미 / 출처_표준국어대사전.


글 이미지: 이웃 승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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